나의 학창 시절 중에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기간이 있다.
초1, 2,3은 오전반만 해서인지 아이들과 논 기억밖에 없고, 초4도 대체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고2, 고3 재미없던 시절이라 기억이 나지 않나 보다.
오늘은 기억이 잘 나지 않던 학창 시절 중 초4 때를 기억해보려고 한다.
내가 살던 쌍문 2동에 사교육 바람이 분 적이 있다.
당시 모든 사교육은 불법이었고 여기서의 사교육은 바로 사립초등학교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 어머니는 번호 뽑기를 잘하셔서-나를 집에서 좀 떨어진 H초등학교로 전학을 시키셨다. 그 학교 등교방법은 스쿨버스였다. 아침 일찍 스쿨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아침잠이 많던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등교 첫날, 어머니의 배웅으로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로 출발했다. 첫 등굣길의 버스에서 싸움에 났다.
전학생에게 텃세를 부리기에 기세를 좀 누르려했다.
폭력적 성향을 가지진 않았지만 이유 없는 괴롭힘을 견딜만한 인내심도 없었다.
첫날 등굣길에 찾아간 곳은 교장실이었다.
첫날부터 싸움질을 한 전학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맞이해 줄 선생님은 없을 것이다.
나의 사립초등학교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내가 전학한 사랍학교는 한 학년이 3개의 반이고, 각 반은 3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전 공립학교는 한 반에 70명이 넘고 - 그것도 오전, 오후반으로- 그런 반이 15개 반 정도 되었다.
그런 공립학교에 비하면 너무 소꿉장난 같은 인원이었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비싼 돈 내고 보내는가 싶다.
이 학교에서 놀란 것은 교육과정이었다.
이전 학교에서 과학시간이 되면 전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시청각교재(?)를 긴 막대로 넘기면서 설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다르다. 예를 들어 화산이 폭발하고 마그마가 흘러서 암석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도 실제와 비슷한 화산 폭발과정을 재연하면서 말이다. 세상에! 이런 교구가 있다니! 왜 다른 학교는 이런 것을 하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CA(정규과목 외 활동) 시간이다.
공립학교에서는 대부분 지지고 볶고 하던 시간으로 때우던 시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CA시간에 야구부를 들면 옆 대학교 야구장으로 야구를 하러 가고, 컴퓨터부에 들면 당시 SPC-1000( 1982 판매 후 학교에 배포)으로 Basic언어를 배우고 카세트테이프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니까 당시는 1983년인 것이다.
정말 없이 살던 시절, 100원이면 아이스크림도 하나 먹고 쫀드기도 하나 먹던 시절말이다.
1년간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의 부모는 의사, 한의사, 사업가, 고위직 공무원 등등 도봉구에서 좀 산다는 사람들의 자녀는 다 온듯했다. 굳이 나는 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선생님들의 차별도 눈에 선하게 보였다. 당시에는 김영란법이 없었으므로 스승의 날이 빅이벤트였다. 아마도 나는 탐탁지 않은 선물을 가져다 드림 기억이 있다. 선생님은 한 번도 대화에서 인상을 쓰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4학년은 내 중심이 아닌 다른 아이들이 중심인 그런 시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의 4학년은 잘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다.
다만, 당시 경험했던 신문물들이 신기했고
자녀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느라 노력했던 부모님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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